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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과 해외현장학습 수기 - 중국, 서안을 걷다(사학과15 김정현)

사학과 해외현장학습 수기 - 중국, 서안을 걷다(사학과15 김정현)

중국, 서안을 걷다(사학과15 김정현)

누구든 중고등학교 시절을 거쳤다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4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인 중국 황하(黃河). 황하가 운반하는 최상의 진흙은 범람을 거듭하며 황하 주변의 땅을 비옥하게 하였고 이 황하의 중류 유역에 서안(西安, Xian)이 위치한다. 위에서 내려다본 서안은 북으로는 고원, 남으로는 산맥으로 둘러싸인 분지형 평원으로, 황하의 여러 지류가 모여 있어 수원(水源) 또한 풍부하다. 비옥한 토지, 풍부한 수원, 자연의 장벽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로서의 서안은 중국 고대 역대 왕조의 수도로 역할을 했다. 서주(西周)때는 호경, 진(秦)때는 함양, 그리고 한(漢)·수(隋)·당(唐)에 이르러서는 장안으로 불리면서 서안은 대륙의 중심으로 자리한다.

역사를 공부하는 학생에게 가장 기대되는 순간은 글로 배웠던 역사의 현장에 발을 디디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동아시아 삼국의 역사에 관심이 깊은 나로서 이번 중국 서안 방문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중국과 한국은 고대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역사·문화·경제·외교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기에, 동아시아의 역사를 배우면서 중국을 경시하기란 쉽지 않다.

나는 황하의 호구폭포를 통해 중국 문명의 탄생을 엿보았고, 진·한대의 도용(陶俑)을 비교하면서 왕조의 흥망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당대에 건립된 이슬람 사원과 명대의 성벽 위를 걸었으며, 의외의 공간에서 중국 근현대의 역사적 장면을 마주했다. 2016년 무더운 여름, 하계 해외현장학습을 통해 선사 황하 문명부터 근현대시대까지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중국 서안을 눈에 담았다.

 1. 중국 문명의요람 <황하 호구폭포 & 반파박물관>

호구폭포는 황하의 여러 지류(支流)가 한데 모이는 곳으로, 황하의 격동적인 움직임과 거대함을 몸소 느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나와 일행은 숙소가 있는 서안 시내에서 호구폭포까지 왕복 10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달려 도착했다. 서울에서 한반도 최남단인 해남까지 왕복 9시간이 걸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국이 얼마나 광활한지 조금이나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황하를 본다는 기대감과 ‘강물이 얼마나 누렇길래 이름까지 황하일까?’라는 의구심을 안고 호구폭포를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실제로 마주한 황하는 내가 상상한 그 이상이었다. 황하의 물줄기는 누렇다 못해 거무튀튀했으며, 마치 초콜릿이 강을 이뤄 꾸덕꾸덕 흐르는 듯했다. 위 지평선으로부터 황하의 지류들이 한 대모여 엄청난 광음을 내며 쏟아지고 있었다. 호구 폭포 밖에 작은 웅덩이에 진흙물이 고여 있어 들어 올려보니, 진흙이 손가락 사이로 흐를 정도로 흙의 입자가 곱고 부드러웠다.

최양질의 진흙이 흐르는 이 황하를 따라 다양한 선사 문명이 누층적으로 발전했다. 그중에서도 주목해야 할 점은 앙소문화와 그의 토기이다. 다음으로 방문한 <반파박물관>은 선사 유적지 박물관으로, 앙소문화의 대표적 유적지인 반파촌을 기반으로 세워졌다. 신석기 시대의 여러 유물 중에서도 역시 눈에 띄는 것은 당연 토기였다. 한국의 선사 문명의 토기는 표면이 거칠다면, 황하가 운반한 고밀도 진흙으로 빚어진 토기의 표면은 부드럽고 윤기가 났다. 그 위에 그려진 물고기 무늬는 아마 선사인(先史人)이 황하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형상화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2. 중국 황제의 무덤 <병마용갱 & 한양릉박물관>

이번 하계 해외현장학습에서 가장 기대했던 일정이 진시황제의 병마용 갱이었는데, 한양릉 (漢陽陵)박물관과 함께 비교해 관람하면서 즐거움이 배가 되었다. 대부분이 알고 있듯이 병마용 갱은 죽은 진시황제를 사후에서도 지키기 위해서 제작된 지하 궁전의 군대이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을 진시황제와 함께 묻을 수 없기에 흙으로 실제 사람의 크기로 빚었는데, 그 사실적인 표현과 거대한 규모로 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30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에도 병마용 갱을 둘러 싼 수많은 사람 속에서 나는 병마용을 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병사의 지위에 따라 동작과 복장, 나아가 머리 스타일까지 제각각이었고, 얼굴의 골격과 모양에 따라 병사의 출신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이었다. 가장 크고 많은 병마용을 갖추고 있는 1호 갱의 전면에 섰을 때, 거구의 병마용 군대가 마치 나를 향해 진군하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고 그때의 기분을 앞으로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한편 흙으로 빚은 인형인 도용(陶俑)은 진시황제의 병마용 갱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나는 진(秦) 다음으로 건국된 한나라의 도용들을 보기 위해 <한양릉 박물관>으로 이동했다. 한양릉은 한나라 초기의 제 6대 황제인 경제(景帝)와 황후 동영의 합장릉이다. 이곳에서는 진시황제의 병마용 갱과는 또 다른 도용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진시황제의 병마용은 군대의 모습을 실제 사람의 크기로 제작되어 근엄하고 엄격해 보인다면, 한양릉의 도용은 그의 1/3 크기로 인형과 같은 모습의 부드러운 곡선미가 돋보인다. 또한, 병마용에서는 병사와 전투용의 말에 한정되는 군사적인 모습만 확인할 수 있지만, 한양릉에서는 여성, 가축, 동물도용 그리고 생활 토기 등이 함께 발견되어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시간의 간격이 그리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제의 병마용과 한양릉의 도용의 모습에는 왜 이러한 차이가 나타나는 것일까? 진시황제의 병마용 갱과 만리장성 건설 등의 대규모 사업은 곧 백성들의 몫이자 고통이었다. 백성들은 계절을 가리지 않고 무거운 부역에 참여해야 했고 엄청난 세금이 동원되었다. 결국, 진시황제 사후 백성들의 불만이 중국 최초의 농민 반란인 진승·오광의 난으로 표출되었고 진나라는 멸망한다. 이와 같은 진나라의 멸망과정을 지켜본 한(漢)의 지배계층은 멸망의 요인을 답습하지 않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한나라의 도용이 진나라의 병마용에 위세가 눌리는지 추측해볼 수 있다.

 3. 세계제국 당나라를 만나다 <청진대사>

역사를 배우는 데 있어서 종교는 필수불가결한 부분인데, 이는 종교가 한 명의 사람을 뛰어넘어 집단의식과 사회적 가치관을 형성하는 주된 요소이기 때문이다. 가령 세계 4대 종교 중 하나인 이슬람의 사례를 보면 무슬림은 자신의 일평생 이슬람의 5대 의무를 수행하며 쿠란의 법에 따라 돼지고기를 금기시한다. 이처럼 종교는 인간의 정신적 안식처인 동시에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인간의 행위를 형성하고 제한한다.

때문일까, 과거부터 지금까지 종교를 둘러싸고 잦은 전쟁과 다툼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중국 당나라만큼은 달랐다. 당 왕조는 중국 전통 왕조들 중 가장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왕조였다.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외국의 문화와 문물이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지금의 서안)으로 집중되었다. 외국인과 함께 네스토리우스교, 이슬람교, 조로아스터교 등의 이교도가 함께 전래하여 당 제국으로부터 다양성을 인정받았다.

나는 당 왕조 때 건립된 이슬람교의 사원인 청진대사(淸眞大寺)를 방문했다. 청진대사는 중국 당나라 시대에 건축된 이슬람 사원으로, 당 현종 천보1년(742)에 건설되어 지금으로부터 1,3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자랑한다. 현재까지도 청진대사는 중국의 무슬림들에게 정신적 안식처를 제공하는 동시에, 이슬람의 지식을 전수하는 학교 역할을 하고 있다. 청진대사에서는 둥근 돔과 모스크와 같은 현재 이슬람의 건축양식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불교 사원인가 할 정도로 의심할 수 있는데, 이는 이슬람의 건축양식이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당대의 무슬림들이 중국의 전통양식을 본떠 축조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청진대사에서는 이슬람의 문화와 당대의 건축양식을 살펴볼 수 있었다. 청진대사의 예배당의 지붕은 돔을 대신해 푸른빛이 감도는 기와가 얹혀 있고, 전체적으로 전형적인 동아시아의 건축양식을 띄고 있었다. 반면 교회나 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조각상이나 인물화를 찾아볼 수 없었고, 예배당은 동서로 길쭉하게 뻗어있다. 이는 이슬람에서 신을 인간·동물로 그림이나 조각으로서 표현하는 것이 금기이고, 알라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율법에 근거해 예배를 드릴 때도 자리에 위계를 따지지 않고 ‘ㅡ’자로 나란히 서는 이슬람인의 문화가 반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당 왕조의 국제성은 예술작품에서도 드러난다. 앞서 방문한 <섬서 역사 박물관>과 <한양릉박물관-특별전>에서 쉽게 당삼채를 만날 수 있었다. 당삼채는 당 제국(618~906)의 도기로, 주로 당시 귀족들의 장례용으로 제작되어 묘릉에 부장되었다. 남녀의 인물상에서부터 신상, 진묘수, 그리고 각종 명기까지 다양한 주제로 당대 귀족의 생활양상을 잘 보여준다. 그 중 서역인의 모습을 당삼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부리부리한 눈과 큰 코, 이국적인 형상의 당삼채는 당나라과 장안이 세계제국이자 국제도시임을 함축하고 있는 또 다른 증거이기도 하다.

4. 과거와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서안성벽>

서안을 돌아다니면 자주 서안성벽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서안 시내의 중심에 서안 성벽이 있기 때문이다. 서안성벽은 명나라 초기에 건설되었는데 본래 당나라 장안황성의 기초 위에 성벽을 올렸고, 그 이후에도 수차례의 공사를 걸쳐 방어체계를 구축했으며, 현존하는 중국의 성벽 중에 보존상태가 가장 뛰어나다.

서안성벽은 우리나라의 수원화성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서안성벽과 수원화성에서 가장 눈에 띄는 차이점은 성벽을 구성하는 형식에 있다. 서안성벽은 성벽 기초부터 그 위의 전각까지 모두 흙으로 구운 작은 벽돌들을 촘촘히 쌓아 올린 데에 비해, 수원화성은 1m에 달하는 큰 화강암으로 성벽을 쌓고, 그 위에 다시 작은 벽돌로 쌓아 올렸다. 서안은 질 좋은 진흙이, 한반도는 단단한 화강암이 풍부함으로 두 성벽 다 주변 자연환경의 조건에 따라 적절하게 성벽을 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서안성벽은 직사각형의 형태로 서안 시내의 중심을 감싸고 있으며 전체둘레가 무려 13km에 이른다. 서안성벽을 따라 서안 시내의 모습을 천천히 보고 싶었지만, 땡볕 아래에서 그 길을 걷기란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전거 대여가 가능하다고 하니 자전거로 서안성벽 위를 달려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서안성벽 위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과거와 현대의 조화’였다.

명대에 지어진 성벽 위에서 높은 빌딩으로 가득 찬 서안 시내를 바라봤다. 서안성벽의 내부와 외부 모두의 공간을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어서 안과 밖을 자유롭게 통행하는 버스와 사람들이 보였다. 옛 건물과 그 너머에 보이는 현대식 건물들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규모와 역사적의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고, 현대와 과거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는 서안성벽은 곧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날이 멀지 않다고 느꼈다.

5. 중국의 중세와 근대가 공존하는 역사적 공간 <화청지>

화청궁(華淸宮)으로도 불리는 화청지는 본래 온천으로 유명한 곳으로, 여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주나라 때부터 이곳에 왕실의 별장이 만들어졌고, 이후 진·한·수나라를 걸쳐 당나라 현종 때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화청지는 당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로 유명하다. 당 현종은 통치 말까지 양귀비와 화청지에서 머물었기 때문에, 당 현종과 양귀비가 이용했다는 욕탕이 남아 있다.

한편 화청지는 당 후기 안사의 난으로 현종이 궁을 버리고 피신하자 점차 황폐해져 갔지만, 근대에 들어서 다시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는데, 1936년 12월 12일 서안사변이 바로 이곳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공산군 토벌을 위하여 섬서성 서안에 주둔 중인 장쉐량과 휘하의 만주군이 독전(督戰)을 위해 경내의 오간청(五間廳)에서 머물던 장제스를 구금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싸울 것을 요구했다. 이 사건을 결과로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對) 일본 전쟁을 공동으로 수행하는 ‘제2차 국공합작’을 타결할 수 있었던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긴 시간을 뛰어넘어 서로 다르고 이질적인 역사의 현장을 한 공간에서 마주한다는 것은 특이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우선 너무 넓어서 입구에서부터 한참 헤맨 끝에 발견한 화청지 욕탕. 역시나 붐비는 관광객들의 물결에 휩쓸려 허둥지둥 관람할 수 밖에 없었다. 당현종의 연화탕(蓮華湯), 양귀비의 해당탕(海棠湯)과 더불어 관리들의 욕실인 상식탕(尙食湯), 태자탕(太子湯)등 여러 욕탕이 있다. 현재 방영하고 있는 드라마 <보보경심;려>에서 나오는 다미원의 욕탕의 모습을 상상하면 될 것 같다. 욕탕 뒤로 넘어가서 많은 전각들 사이에 있는 오간청(五間廳)을 찾았다. 오간청을 둘러싸고 있는 벽면에 제2차 국공합작의 과정과 관련 인물들의 설명이 부착되어 있고, 오간청의 벽면의 총탄 자국은 그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말해 주는 듯 했다.

하계 해외현장학습을 마치면서

앞서 소개했던 방문지 이외에도 섬서성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섬서 역사 박물관>, 한나라 무제의 대외업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무릉 박물관>, 중국 불교 최대의 성지인 <법무사>, 비석으로 이루어진 <비림 박물관> 등등 서안의 이곳저곳을 방문했는데 함께 소개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비단 A의 역사가 A만의 것으로 국한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 장소를 불문하고 여러 국가는 흥망성쇠를 거듭하는데, 대부분 비슷한 맥락에서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의 잘못을 거듭하지 않기 위한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이기도 한데, 마치 서안성벽에서 수원화성이 떠오르는 것처럼 의외의 곳에서 자국의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특히나 중국은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동아시아에 미치는 영향력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이번 하계 해외현장학습을 통해서, 한반도를 벗어나 동아시아 유교·불교·한자 문화권의 중심이 되었던 중국을 살펴보았다. 중국은 ‘대륙’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어디를 가든지 거대하고 웅장했다. 중국 음식을 직접 먹어보니 왜 중국인이 ‘차(茶)’를 사랑하는지도 깨달았고, 온종일 사람으로 가득 찬 거리를 걸어보니 중국인들이 왜 목청이 높은지도 짐작이 갔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도 중국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세계를 경험하며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자신이 배우고자 하는 바를 얻었으면 좋겠다.